옮긴이 이정희
대학에서 국문학과 일본문학을 전공. 오염된 환경과 화학물질에 리트머스지처럼 반응하는 아이를 키우면서 자연주의, 안전한 먹거리, 대안적인 삶이라는 키워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앞으로도 이 키워드를 중심으로 좋은 책을 소개하고 싶다. 옮긴 책으로는 『인간은 왜 제때 도망치지 못하는가』가 있다.
출판사 서평
시도 때도 없이 갖가지 재난과 사고가 발생하는 재해공화국, 안전후진국 한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로 292명 사망,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32명 사망,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502명 사망, 1995년 대구 지하철 가스 폭발 사고로 101명 사망, 1997년 대한항공 여객기 괌 추락 사고로 228명 사망, 1998년 태풍 예니(Yanni)의 피해로 57명 사망 및 실종,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로 192명(신원미상 6명) 사망, 그리고 올해 세월호 침몰 사고로 304명 사망 및 실종…….
일어나서는 안 될 끔찍한 참사가 유독 많이 발생하는 한국, 아까운 목숨들이 수도 없이 사라져가고 있다. 지진, 홍수, 태풍, 산사태 등의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최근에 일어난 지하철 추돌 사고나 싱크홀 사고, 환풍구 붕괴 사고 등 인재에 의한 각종 재해도 빈번히 발생해 우리는 생명의 위험을 시한폭탄처럼 안고 살고 있다. 재난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고 예고 없이 들이닥친다. 불가항력의 자연재해에 희생되었다면 안타까워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자위할 수 있지만, 살 수도 있었으나 인간의 실수나 무지로 인해서, 혹은 잘못된 판단과 행동으로 인해서 귀한 목숨을 잃었다면 그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은 각종 재난과 사고가 일어났을 때 억울하게 희생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재해심리학적 관점에서 탐구한다. 저자가 한국, 일본, 미국 등지의 수많은 재해 사례와 최근 십 년간의 연구 성과를 분석해 내린 결론은, 재해로 인한 사망 사고의 상당 부분이 ‘제때 도망치지 못한’ 데서 기인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다. 우리는 왜 ‘제때 도망치지 못해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는가? 주된 이유는 인간심리에 깔려 있는 위험한 덫들 때문이다. 안전함과 편리함에 익숙해진 탓에 위험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해 피난 기회를 놓치거나, 다른 사람들이 도망치지 않아서 좀 더 지켜보다가 위험에 빠져버리거나, 안전요원이나 전문가의 말을 과신하는 바람에 안일하게 기다리다가 도망치지 못해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기후변화, 천재지변, 신종 바이러스, 방사능 누출 등 새로운 유형의 재난과 대규모 복합 재난의 발생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새로운 위협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 위험천만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안전한 삶을 유지할 것인가? 이 책은 재해 발생 시 가족과 나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뿐만 아니라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행동 매뉴얼까지 제시하고 있어 ‘재난공화국’에 살고 있는 우리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읽고 기억해야 할 책이다.
일본 재해심리학의 일인자, 히로세 히로타다 교수의 절박한 경고
낡은 재해관에서 벗어나라!
2011년 3월 11일에 후쿠시마를 강타한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사망한 사람은 2만 명에 달하는데 그중 10퍼센트가 지진으로, 나머지 90퍼센트가 쓰나미에 의해 사망했다. 일본은 그동안 이 지역을 비롯해 일본 동남해 연안에 발생할 대형 지진에 오랫동안 대비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는 막대했다. 특히 동일본 대지진에서 거대 쓰나미가 도착하기까지는 십 분에서 한 시간가량의 여유가 있었고, 큰 피해를 입은 다로우 지구는 쓰나미에 의해 자주 피해를 겪었던 곳이라 이에 대한 대피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만 2백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왜 이런 큰 피해가 발생했을까? 문제는 쓰나미 상습 피해지역이므로 거주지역을 높은 지대로 옮기라는 권고를 실행하는 대신, ‘만리장성’이라 불리는 대형 방파제를 건설하고 쓰나미 위험지대에 호텔을 세우는 등 마치 쓰나미를 완벽하게 방어할 수 있는 지역인 것처럼 주민들을 안심시킨 데 있었다. 만약 방파제가 있으니 쓰나미가 와도 괜찮다고 안심하지 않았다면, 또 이 정도 심한 지진이 온 직후니까 신속하게 높은 곳으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하며 행동했다면 사망자는 더 적었을 수 있었다고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저자는 아무리 견고한 만리장성이라도 ‘재해’라는 침입자는 그것을 쉽게 넘는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행동과 심리 속에 오히려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최선책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우리가 억울하게 죽지 않기 위해 유의해야 할 심리적인 덫을 크게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안심하고 싶기에 위험을 외면하는 덫, ‘정상성 바이어스bias’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태풍이나 홍수, 쓰나미 등의 재해 시에 피난 권고나 피난 지시가 내려져도 피난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50퍼센트를 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현재의 안전과 편리함에 적응되어버린 탓에 위험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위험의 전조현상이 있어도 특별한 이상은 없다고, 정상에서 조금 벗어난 정도라고 믿으며 안심해버리는 것을 정상성 바이어스라고 한다.
이 책에서 구체적인 예를 들고 있는 것은 뜻밖에도 우리나라의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이다. 당시 연기가 가득 차 있는데도 조용히 참고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승객에 의해 촬영되어 우리나라에서도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저자는 이들이 무언가 이상 징후를 느끼고 있으면서도 위기에 대응하는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정상성 바이어스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둘째, 서로에게 의존하는 덫, ‘동조성 바이어스’
스스로는 위험을 느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도망치지 않아서 좀 더 지켜보다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타인과 때를 같이해 똑같이 움직이려는 동조행동은 재해 시에 제때 피난하는 것을 방해한다.
대형 재해에서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늦다. 동조성 바이어스를 피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느꼈다면 혼자서라도 피난행동을 시작해야 한다.
셋째, 그릇된 패닉관의 덫, 패닉 신화
그릇된 패닉관을 수정하는 바로 제4장이 어쩌면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 할 것이다. 저자는 전문가의 상식과 일반인의 상식이 크게 어긋나는 경우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패닉’을 꼽는다. 패닉이란 비이성적이고 이상스러운 집단적 도주행동을 말하는데, 저자에 따르면 재해나 사고 시에 실제로 패닉이 일어나는 일은 무척 드물다.
1977년 미국 신시내티 시 외곽의 비벌리힐스 서퍼 클럽 화재에서는 패닉을 두려워해 “작은 화재입니다. 불이 난 곳은 여기에서 꽤 멀지만, 지금 피난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위험을 완화해서 전달하는 바람에 1,350명 중 164명이 사망하는 참사를 불렀다.
이처럼 일반인들이 ‘패닉 신화’를 신봉하게 된 것은 1942년 11월에 발생한 보스턴 시의 나이트클럽 코코넛 그로브 대화재가 발단이었다. 사회심리학자 벨포트와 리는 코코넛 그로브 대화재의 원인을 검토한 후 짧은 시간 안에 5백 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한 원인은 클럽 오너나 웨이터, 소방서나 시청 직원 등 개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패닉에 있다고 결론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많은 피해자가 유독 가스로 사망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패닉이 일어날 틈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심각한 결과와 경미한 원인의 갭gap을 무언가로 메우고 싶다는 유혹이 패닉을 희생양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패닉에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매우 안이한 태도라고 지적한다. 누군가 패닉이란 용어로 피해를 설명하려고 할 때는 재해와 사고의 원인 규명을 방기하고 방재 실패를 감추려고 하는 불순한 동기가 있지는 않은지 우선 의심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한다.
넷째, 함부로 권위를 신용하는 덫, 전문가 오류
방재나 위기관리 전문가는 훈련을 거듭하므로 보통의 경우에는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적다. 하지만 예상외의 재해나 사고가 발생하면 오판을 하기도 한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발생한 동시다발 테러에서는 2천8백 명가량이 희생되었고, 항만관리청 소속 경찰관 37명이 사망했다. 그 경찰관들은 피난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기다리세요”라는 구조 전문가의 지시를 과도하게 신뢰한 나머지 피난 기회를 놓쳤다. 대혼란 속에서는 경찰이라고 해도 실수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 2014년 4월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에서도 이는 뼈아픈 교훈으로 남아 있다.
다섯째, 돌발 재해 시 행동마비에 빠지는 덫, ‘얼어붙는 증후군’
예고 없는 재해가 닥치면 패닉과 같은 과잉반응보다 오히려 망연자실해 심신이 마비되는 상태에 빠지기 쉽다. 쇼크에 대한 생리심리적인 반사행동을 ‘얼어붙는 증후군’이라 하는데, 이것이 제때 도망치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시간이 매우 짧기 때문에 긴박한 순간에 누군가 얼어붙은 상태에 빠진다면 “정신 차려, 빨리 도망가야 해”라고 크게 외쳐 얼어붙은 상태를 해동시켜줘야 한다.
어떤 사람이 살아남는가?
예기치 않은 재해나 사고를 당했을 때는 역시 젊은 사람일수록 살아남기가 쉽다. 이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시에 생존 가능한 기간이 상당히 지났음에도 무사히 구출된 세 명의 젊은 남녀 생존자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생존자는 사고 후 16일 만에 기적적으로 구조된 바 있다.
또한 재해가 끼치는 타격은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에게 더 무겁고 부유한 사람들에게 더 가볍다는 충격적이고 불편한 진실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벼움과 무거움은 두 가지를 내포한다. 손해의 양적인 규모가 빈곤층에서 더 크고, 부유층에서 더 작다는 절대적인 의미와 양적으로 같은 손해를 입더라도 빈곤층에는 더 심각한 타격을, 부유층에는 경미한 타격을 끼친다는 상대적인 의미 둘 다를 포함한다. 후자는 명백할 수 있지만, 전자는 충격적이지 않은가.
그 외에 냉정하고 침착하게 행동하는 사람, 적시의 의사결정 능력과 행동력을 갖춘 사람, 그리고 생존의 의지를 갖고 포기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생존율이 높다. 냉엄한 사실이지만, 재해는 약자를 꺾어버린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재해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20세기가 전쟁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재해의 세기라고 할 만하다. 이 책은 재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원론적인 정의에서부터 재해 대응의 유형, 재해 시의 인간심리, 살아남기 위한 조건, 자원봉사자 활동의 유용성, 재해가 가져온 사회적 변화에 이르기까지 재해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재난 시 인간심리에 초점을 맞추어 위험한 상황에서 취해야 할 피난행동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매우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그 외에도 재난 시 이재민의 구호를 행정기관이 전부 떠안는 것은 불가능하며, 자원봉사자의 활동이 곤란한 상황과 스트레스로 고통 받는 이재민의 마음을 위로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또한 그들을 보다 조직적이고 기민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체제를 정비해야 한다는 대목도 깊이 새길 만하다.
사회 변동의 원인으로서 재해를 조명한 것도 새롭게 다가온다. 대형 재해는 그때가지의 사회시스템의 결함을 클로즈업해 보여줌으로써 사회를 변동기에 들어서게 만든다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별개로 한다면, 재해를 입은 사회시스템은 재해 이후의 사태에 적응하기 위해 기능면에서 합리화, 효율화를 단행한다. 평상시에는 다양한 저항에 부딪쳐 실행할 수 없었던 스크랩 앤 빌드scrap &build는 긴급사태를 맞이해 쉽게 단행할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사회시스템에 변화가 일어난다. 리스본 대지진, 유럽을 휩쓴 페스트, 런던 대화재 등은 재해가 도시의 근대화와 효율화를 촉진시킨 전형적인 사례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심리를 이해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성급한 판단일 수 있다. 만약 호텔이나 백화점, 아파트의 관리책임자가 패닉 신화의 신봉자로서 많은 이들이 패닉에 빠져 대혼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해 화재 발생 안내를 늦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대참사로 이어질 것은 자명하다. 아는 것은 힘이고, 알면 대처할 수 있는 방법도 찾게 마련이다.
새 시대에는 새로운 재해가 닥친다. 그렇다고 걱정할 일만은 아니다. 새로운 재해는 다음의 재해에 대응할 힘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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